과외 단속을 뚫은 비결은 바로···'○ 뚫기' [오래 전 '이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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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창망살 작성일20-02-18 14:35 조회219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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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부터 2010년까지 10년마다 경향신문의 같은 날 보도를 살펴보는 코너입니다. 매일 업데이트합니다.
■1980년 2월18일 과외 단속을 뚫은 비결은 바로···'○ 뚫기'였다
‘독버섯처럼’ 번지던 과외방을 그린 일러스트. 경향신문 자료사진
영화 <기생충>의 봉준호 감독이 한 인터뷰에서 대학생 시절 부잣집 아이의 과외교사로 채용됐지만 금방 잘렸다는 경험을 밝힌 적이 있습니다.
과외에 대한 추억은 세대별로 엇갈리는데요. 60~70년대에는 대학생 입주과외가 유행했고, 현직 교사나 교수, 학원강사들이 불법과외를 하기도 했습니다. 1980년 7월30일에는 과외가 전면금지됐지만, 89년에는 대학생 과외가 허용되기도 했죠.
40년 전 오늘은 아직 과외 전면금지가 발표되기 몇 달 전이었습니다. 당시 과외시장이 과열되면서 사회적 문제로 비화했고, 경향신문에는 <과외병, 처방은 없나>라는 기획기사가 연재되고 있었습니다.
이날 소개된 내용은 ‘과외방’ 단속이 유명무실한 이유에 대한 것이었는데요.
여기 등장하는 과외방은 그룹과외를 할 장소로 가정집의 방을 월세를 받고 대여해주는 것이었습니다. 교육청 직원들의 단속을 피해 고수익을 올리며 과외촌 일대에서 ‘교장’으로 불리던 P부인의 비결도 공개됩니다.
1980년 2월18일자 경향신문 6면
P부인은 서울 신문로에서 10여년 전부터 과외방 대여업을 해왔습니다. 이 집을 거쳐한 학생이 1000여명이니, 동네 사람들은 그를 ‘교장’이라고 불렀습니다.
시작은 미약했습니다. 교통사고로 남편을 잃고 생계를 위해 방 2개를 대여한 것이었죠. 그러다 과외경기가 활활 타오르자 여고 뒷골목에 건평 60평 한옥 두 채를 사들여 전문 과외방 대여업자가 됩니다.
나란히 붙어있는 두 한옥에 방이 5개씩이었고, 직접 사용하는 방들을 빼고 총 8개의 방을 ‘교실’로 풀가동했는데요. 방 하나를 주 3일을 대여하는 비용이 한 달에 5만원이었습니다. 방이 8개니까 기본은 40만원이지만, 시간과 요일을 잘 조정하면 방 하나에 주 3일짜리 세 팀을 수용할 수 있었습니다.
P부인의 수입은 한 달에 120만원. 1980년에 120만원은 어느 정도 수준의 소득이었을까요?
통계청의 화폐가치계산 페이지에서 가장 최근인 2020년 1월과 40년 전을 비교해보면, 대략 650만원대의 수익으로 나옵니다.
하지만 당시 평균 월급이 전문기술직은 32만원선, 사무직은 21만원선, 판매직은 11만원선, 서비스직은 10만원선이었다고 하니 전문기술직보다도 4배 가까이 고수입을 올렸던 것으로 보입니다.
통계청 화폐가치계산 체험 사이트
P부인이 단속에 걸린 것은 초창기에 딱 두 번뿐이었습니다. 그리고 10여년이 지나 베테랑이 된 P부인은 신출귀몰한 방법으로 단속나온 교육청 직원들을 골탕먹입니다.
1년 전 여름방학, “시끄러워 못살겠다”는 이웃주민들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교육청 사회교육계 직원 3명은 골목 어귀에 잠복해 있었습니다. 이들은 오후 3시쯤 책가방을 든 남고생 7명과 여고생 5명이 P부인 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후 초인종을 눌렀습니다.
벨을 계속 누르고 5분쯤 지나 나타난 어린 소녀는 단속반원들의 신분증을 보고도 “우리집은 그런 집이 아니다”라고 잡아뗍니다.
단속반원들이 대문을 밀치고 들어갔더니, 문간방에 자습하고 있던 여학생 5명만 보입니다. 다락방, 부엌, 화장실까지 샅샅이 뒤졌지만 남학생들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당시 사설강습소 단속법은 ‘동일시간 동일장소에서 10명 이상’ 가르치는 곳을 단속대상으로 규정했기 때문에, 5명의 여고생으로는 처벌이 불가능했습니다. 결국 단속반원들은 샛문을 통해 학생들이 뒷골목으로 빠져나갔다고 판단하고 발길을 돌렸습니다.
그런데 그 남학생들은 그 시간에 공부를 하고 있었습니다. P부인이 차명구매한 옆집과 이집의 안방벽이 맞닿아 있었고, 그곳에 비밀통로를 뚫려있었기 때문이죠. ‘불청객’이 나타날 때마다 장롱 뒤 비밀통로를 통해 학생들을 양쪽 집으로 대피시켰는데, 단속을 뚫기 위해 실제 벽을 뚫었다는 게 절묘하네요.
1988년 비밀과외로 경찰에 적발된 학원강사들. 경향신문 자료사진
과외방 고객은 특히 신분 노출을 꺼리는 전·현직 대학교수나 고교교사, 유명학원 강사 등 특A급 선생들이 많았기 때문에 보안유지가 생명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과외방 대여업자들도 인기강사 유치를 위해 상당한 시설투자를 하고 있었다네요.
단속담당 직원들은 숫자가 적어 자주 단속에 나오지 못했고, 과외방 대여업자는 단속에 걸려도 20만원 정도의 벌금을 물거나 장소를 옮기면 그만이었다고 합니다. 사설강습소법에 특별한 강제규정이 없기 때문이었죠. 규제의 빈틈을 파고들어 고수익을 올린 P부인은 구멍이 숭숭 뚫린 법이 고마웠을 겁니다.
그나저나 당시 옆집으로 대피를 했던 저 다섯명의 남학생들은 지금 이 사건을 어떻게 추억할까요? 불법을 들킬 뻔한 꺼림칙했을까요, 단속을 따돌렸으니 이제 마음껏 공부하자며 가슴 쓸어내렸을까요, 이러건 저러건 상관없으니 어서 이 지옥같은 입시경쟁이나 탈출하자 생각했을까요?
임소정 기자 sowhat@kyunghyang.com
▶ 장도리
1960년부터 2010년까지 10년마다 경향신문의 같은 날 보도를 살펴보는 코너입니다. 매일 업데이트합니다.
■1980년 2월18일 과외 단속을 뚫은 비결은 바로···'○ 뚫기'였다
‘독버섯처럼’ 번지던 과외방을 그린 일러스트. 경향신문 자료사진
영화 <기생충>의 봉준호 감독이 한 인터뷰에서 대학생 시절 부잣집 아이의 과외교사로 채용됐지만 금방 잘렸다는 경험을 밝힌 적이 있습니다.
과외에 대한 추억은 세대별로 엇갈리는데요. 60~70년대에는 대학생 입주과외가 유행했고, 현직 교사나 교수, 학원강사들이 불법과외를 하기도 했습니다. 1980년 7월30일에는 과외가 전면금지됐지만, 89년에는 대학생 과외가 허용되기도 했죠.
40년 전 오늘은 아직 과외 전면금지가 발표되기 몇 달 전이었습니다. 당시 과외시장이 과열되면서 사회적 문제로 비화했고, 경향신문에는 <과외병, 처방은 없나>라는 기획기사가 연재되고 있었습니다.
이날 소개된 내용은 ‘과외방’ 단속이 유명무실한 이유에 대한 것이었는데요.
여기 등장하는 과외방은 그룹과외를 할 장소로 가정집의 방을 월세를 받고 대여해주는 것이었습니다. 교육청 직원들의 단속을 피해 고수익을 올리며 과외촌 일대에서 ‘교장’으로 불리던 P부인의 비결도 공개됩니다.
1980년 2월18일자 경향신문 6면
P부인은 서울 신문로에서 10여년 전부터 과외방 대여업을 해왔습니다. 이 집을 거쳐한 학생이 1000여명이니, 동네 사람들은 그를 ‘교장’이라고 불렀습니다.
시작은 미약했습니다. 교통사고로 남편을 잃고 생계를 위해 방 2개를 대여한 것이었죠. 그러다 과외경기가 활활 타오르자 여고 뒷골목에 건평 60평 한옥 두 채를 사들여 전문 과외방 대여업자가 됩니다.
나란히 붙어있는 두 한옥에 방이 5개씩이었고, 직접 사용하는 방들을 빼고 총 8개의 방을 ‘교실’로 풀가동했는데요. 방 하나를 주 3일을 대여하는 비용이 한 달에 5만원이었습니다. 방이 8개니까 기본은 40만원이지만, 시간과 요일을 잘 조정하면 방 하나에 주 3일짜리 세 팀을 수용할 수 있었습니다.
P부인의 수입은 한 달에 120만원. 1980년에 120만원은 어느 정도 수준의 소득이었을까요?
통계청의 화폐가치계산 페이지에서 가장 최근인 2020년 1월과 40년 전을 비교해보면, 대략 650만원대의 수익으로 나옵니다.
하지만 당시 평균 월급이 전문기술직은 32만원선, 사무직은 21만원선, 판매직은 11만원선, 서비스직은 10만원선이었다고 하니 전문기술직보다도 4배 가까이 고수입을 올렸던 것으로 보입니다.
통계청 화폐가치계산 체험 사이트
P부인이 단속에 걸린 것은 초창기에 딱 두 번뿐이었습니다. 그리고 10여년이 지나 베테랑이 된 P부인은 신출귀몰한 방법으로 단속나온 교육청 직원들을 골탕먹입니다.
1년 전 여름방학, “시끄러워 못살겠다”는 이웃주민들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교육청 사회교육계 직원 3명은 골목 어귀에 잠복해 있었습니다. 이들은 오후 3시쯤 책가방을 든 남고생 7명과 여고생 5명이 P부인 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후 초인종을 눌렀습니다.
벨을 계속 누르고 5분쯤 지나 나타난 어린 소녀는 단속반원들의 신분증을 보고도 “우리집은 그런 집이 아니다”라고 잡아뗍니다.
단속반원들이 대문을 밀치고 들어갔더니, 문간방에 자습하고 있던 여학생 5명만 보입니다. 다락방, 부엌, 화장실까지 샅샅이 뒤졌지만 남학생들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당시 사설강습소 단속법은 ‘동일시간 동일장소에서 10명 이상’ 가르치는 곳을 단속대상으로 규정했기 때문에, 5명의 여고생으로는 처벌이 불가능했습니다. 결국 단속반원들은 샛문을 통해 학생들이 뒷골목으로 빠져나갔다고 판단하고 발길을 돌렸습니다.
그런데 그 남학생들은 그 시간에 공부를 하고 있었습니다. P부인이 차명구매한 옆집과 이집의 안방벽이 맞닿아 있었고, 그곳에 비밀통로를 뚫려있었기 때문이죠. ‘불청객’이 나타날 때마다 장롱 뒤 비밀통로를 통해 학생들을 양쪽 집으로 대피시켰는데, 단속을 뚫기 위해 실제 벽을 뚫었다는 게 절묘하네요.
1988년 비밀과외로 경찰에 적발된 학원강사들. 경향신문 자료사진
과외방 고객은 특히 신분 노출을 꺼리는 전·현직 대학교수나 고교교사, 유명학원 강사 등 특A급 선생들이 많았기 때문에 보안유지가 생명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과외방 대여업자들도 인기강사 유치를 위해 상당한 시설투자를 하고 있었다네요.
단속담당 직원들은 숫자가 적어 자주 단속에 나오지 못했고, 과외방 대여업자는 단속에 걸려도 20만원 정도의 벌금을 물거나 장소를 옮기면 그만이었다고 합니다. 사설강습소법에 특별한 강제규정이 없기 때문이었죠. 규제의 빈틈을 파고들어 고수익을 올린 P부인은 구멍이 숭숭 뚫린 법이 고마웠을 겁니다.
그나저나 당시 옆집으로 대피를 했던 저 다섯명의 남학생들은 지금 이 사건을 어떻게 추억할까요? 불법을 들킬 뻔한 꺼림칙했을까요, 단속을 따돌렸으니 이제 마음껏 공부하자며 가슴 쓸어내렸을까요, 이러건 저러건 상관없으니 어서 이 지옥같은 입시경쟁이나 탈출하자 생각했을까요?
임소정 기자 sowhat@kyunghyang.com
▶ 장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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