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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11일 나는 그만둔다, 고로 시작한다 [오래 전 '이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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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매언원 작성일20-03-11 10:22 조회11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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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부터 2010년까지 10년마다 경향신문의 같은 날 보도를 살펴보는 코너입니다. 매일 업데이트합니다.

■2010년 3월11일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

2010년 3월10일 어느 고려대학교 학생이 후문에 붙은 대학 자퇴 대자보를 읽고 있다. 대자보 옆에는 ‘당신의 용기를 응원합니다’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라는 글귀가 쓰인 두 장의 A4용지와 장미꽃 세 송이가 나붙었다. 김창길 기자
김예슬 선언을 기억하십니까. 때아닌 폭설이 내린 3월의 어느 오후, 전도유망한 한 대학생이 ‘대학 탈출 선언’을 했던 일 말입니다.

10년 전 오늘 경향신문에는 전날 고려대학교 정경대학 후문에 실명으로 나붙은 장문의 대자보를 다룬 기사가 1면에 실렸습니다. 기사에 따르면 그 대자보는 ‘비싼 등록금과 취업난의 수렁에 빠져 있는 88만원 세대의 이유있는 항변’이었습니다.

‘자발적 퇴교를 앞둔 고려대 경영학과 3학년 김예슬’이라고 본인을 소개한 김씨는 전지 3장에 빼곡하게 자신이 왜 이런 선택을 하는지 밝혔습니다.

“G(글로벌)세대로 ‘빛나거나’ 88만원 세대로 ‘빚내거나’ 그 양극화의 틈새에서 불안한 줄다리기를 하는 20대, 뭔가 잘못된 것 같지만 어쩔 수 없다는 불안에 앞만 보고 달려야 하는 20대”로 살고 있는 그는 “친구들을 넘어뜨린 것을 기뻐하면서 앞질러 가는 친구들에 불안해하면서” 대학 관문을 뚫고 트랙을 질주해왔다고 했습니다.

또 “(새 자격증도) 10년을 채 써먹을 수 없어 낡아 버려지고 우리들은 또 대학원에 유학에 돌입한다”며 “큰 배움 없는 ‘大學’ 없는 대학에서 우리 20대는 ‘적자세대’가 돼 부모 앞에 죄송하다”고 했습니다.

그는 ‘결국 죽을 때까지 불안함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이유가 나 때문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며 대학을 정조준합니다. “이름만 남은 ‘자격증장사 브로커’가 된 대학. 그것이 이 시대 대학의 진실”이며 “국가와 대학은 자본과 대기업의 ‘인간 제품’을 조달하는 하청업체가 됐다”고 말이죠.

김씨는 “더 많이 쌓기만 하다가 내 삶이 시들어버리기 전에 쓸모 있는 상품으로 ‘간택’되지 않고 인간의 길을 ‘선택’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이 선택으로 “길을 잃고 상처받을 것”이고 “대학과 자본의 이 거대한 탑에서 내 몫의 돌멩이 하나가 빠진다 해도 탑은 끄떡없을 것”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럼에도 대학답지 못한 대학을 스스로 거부함으로써 ‘진정한 대학생의 첫 발’을 내딛는다고 했습니다.

2010년 3월11일 경향신문 1면
자퇴선언 당시 “개인에게 관심이 쏠리는 것은 부담스럽다”며 인터뷰를 사양했던 김씨는 한 달여 뒤 경향신문 기자와 만납니다. <김예슬 선언>이라는 작은 책자를 들고 온 그는 “한 사람의 인생에 있어 대학을 거부한다는 게 단순히 치기어린 행동은 아니었다”며 “고통이 깊어가고 있으니 내가 아니라 누구라도 했을 일”이라고 결단의 배경 등을 전했습니다.

한 사람의 깊은 고민과 결단이 담긴 이 대자보는 많은 응원과 반성으로 이어졌습니다. 대학들에서는 김씨의 문제의식에 공명하는 대자보들이 붙었고, 학생 문화제와 토론회가 열렸으며, 포털사이트엔 대학·자본·사회를 고발하는 ‘김예슬 선언’이라는 온라인 카페가 생겼습니다.

김씨의 선언은 2013년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 릴레이와 2015년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반대’ 대자보로도 이어지며 2010년대를 관통하는 하나의 현상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김씨는 대학 자퇴선언 이후 사회운동단체의 사무처장으로 다시 언론에 조명을 받습니다. 2017년 촛불혁명 1주년을 기념해 <촛불혁명>이라는 책을 출간했고, 지난 2월 일본어판 발간을 기념해 일본 국회에서 강연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2017년 뒤 인터뷰에서 자퇴 후 비로소 진심으로 울고 웃을 줄 알게 됐고, 그만큼 성장했다고 밝혔습니다.

2010년 대학 자퇴선언 대자보를 기반으로 쓴 소책자 <김예슬 선언>(왼쪽)과 촛불혁명 1주년을 기념해 발간한 촛불집회 1년간의 현장 기록 <촛불혁명>.
▶관련 기사: 고려대 자퇴생 김예슬씨 인터뷰 “거대한 적 ‘대학·국가·자본’에 작은 돌을 던진 것”

▶관련 기사: [서의동의 사람·사이-김예슬]“대학을 벗어나니, 내안에 엄청나게 큰 내가 있음을 깨달았다”

▶관련 기사: “승리한 혁명 경험, 공동체의 위대한 자산”...일본 의원회관서 ‘촛불혁명’ 강연

임소정 기자 sowhat@kyunghyang.com


▶ 장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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