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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침 허가 받으려 매달린 김일성… 스탈린, 1950년 4월에 허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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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우준예 작성일20-03-27 15:50 조회14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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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70주년] 김재동 목사의 잊지 말아야 할 그때 그 역사 <2>김일성이 1949년 3월 박헌영 부수상 등 6명의 각료와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의 사진. 김일성은 스탈린을 찾아가 군사 원조와 무기·장비 지원을 요청하고 ‘남침 전쟁’ 허가를 간청했다. 국민일보DB
6·25전쟁 발발 원인을 놓고 한때 북침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소련이 붕괴한 뒤인 1994년 6월 2일 김영삼 대통령이 러시아를 방문했을 때 넘겨받은 6·25전쟁 관련 216점, 548쪽의 문건과 미국 공문서보관소에 소장된 160만쪽의 문서에서 6·25전쟁이 남침임이 드러났다.

김일성은 1949년 3월 3일부터 20일까지 박헌영 부수상 겸 외상 등 6명의 각료와 함께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3월 7일에는 스탈린을 찾아가 무기와 장비 지원 등 군사 원조를 요청하고 남침 허가를 간청했다. 스탈린은 김일성의 인민군대가 남한 군대보다 절대적 우위에 있지 않으며 미군이 남한에 주둔하고 있다는 등의 이유를 대며 거부했다.

당시의 스탈린-김일성 회담 기록은 94년 일부 공개된 ‘구소련 비밀외교문서’에 나와 있다. 1949년 3월 7일 스탈린과 김일성의 회담 기록을 보면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이렇게 말했다.

“스탈린 동지, 상황으로 볼 때 지금 우리가 전체 한반도를 군사적 수단으로 해방하는 것이 필요하고 가능하다고 믿는다. 우리 군대는 남한 군대보다 강하다. 게다가 우리는 남한 내에서 강력히 일고 있는 게릴라 운동의 지지를 받고 있다. 남한의 인민 대중들은 친미정권을 증오하고 우리를 도울 것이 확실하다.”

스탈린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대는 남침해서는 안 된다.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무엇보다도 북한 인민군은 남조선 군대보다 압도적으로 우월하지 못하다. 둘째, 남한에는 아직도 미군이 있다. 적대관계가 일어나면 미군이 개입할 것이다. 셋째, 38선에 관한 한 미·소 협정이 아직 유효하다. 이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 협정이 우리 측에 의해 파기된다면 그것은 미국이 개입할 수 있는 이유가 된다.”

스탈린은 남침을 허가하는 대신 북한과 경제·문화 협정 등을 체결했다. 이는 명목상의 협정일 뿐, 중요한 것은 3월 17일 체결된 조·소 군사비밀 협정이었다. 이 협정에 의해 소련은 북한에 6개 보병사단, 3개 기계화 부대, 8개의 국경 수비대대에 필요한 무기와 장비, 정찰기 20대, 전투기 100대, 폭격기 30대를 제공하기로 약속했다. 120명의 특별군사고문단을 1949년 5월 20일까지 파견하기로 했다.

북한은 소련과 군사비밀 협정을 체결한 다음 날인 3월 18일, 모스크바에서 소련 당국의 주재 아래 조·중 상호방위협정을 체결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양측은 여하한 성질의 침략에 대해서도 공동 방위를 한다. 어떠한 제국주의 세력이든 북한 또는 중공의 일방을 공격하는 경우, 양국은 그 제국주의 세력에 대한 공동전쟁에 있어 공동행동을 취한다.”

이는 타국이 북한을 공격하면 중공이 개입하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북한이 남침 전쟁을 도발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준 협정이라 할 수 있다.

김일성은 1950년 3월 30일부터 4월 25일까지 스탈린을 재차 찾아가 남침을 허가해 달라고 끈질기게 간청했다. 소련 공산당 중앙위 국제국이 작성한 ‘1950년 3월 30일~4월 25일 김일성의 소련 방문 건’이라는 문서에 의하면 4월 10일 회담에서 스탈린이 김일성의 남침을 허락한 것으로 당시 정황을 기록하고 있다.

김일성이 1950년 3월 30일부터 4월 25일까지 소련이 제공한 특별기를 타고 두 번째로 모스크바를 방문해 스탈린과 만나는 모습. 스탈린은 50년 4월 10일 남침 전쟁을 승인했다. 국민일보DB
이때 스탈린이 김일성의 간청을 수락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인민군대 군사력이 남한보다 절대적으로 우세하게 육성됐다. 남한의 군사력 즉 무기, 장비가 미약하고 전투병력은 전투 경험이 없다. 둘째, 국제 정세가 유리하게 변했다. 중공군이 중국을 공산화하고 1949년 10월 1일 공산국가를 수립했다. 이제 중공이 북조선의 남침 전쟁을 도울 수 있게 됐다. 미군이 1949년 6월 남한에서 철수하고 1950년 1월 12일에는 애치슨라인을 통해 남한을 극동 방위권에서 제외했다.

남침을 허가한 스탈린은 바실리에프 장군에게 남침 전쟁 작전 계획을 작성토록 지시했다. 바실리에프 중장에 의해 작성된 김일성의 남침 전쟁 계획은 3단계 작전으로 만들었다.

“제1단계 작전은 38선을 돌파해 2일 만에 서울을 점령한 후 수원 원주 삼척을 잇는 선까지 5일 안에 진격하고, 제2단계 작전은 그로부터 14일 안에 군산 전주 대구 포항을 잇는 선까지 진격한다. 제3단계는 그 후 10여일 안에 목포 여수 사천 마산 부산을 잇는 남해 일대를 점령해 전쟁을 종결한다.”

이상 여러 자료를 통해 6·25전쟁은 양쪽의 과실에 의해 벌어진 단순한 민족상잔의 비극이 아니라 스탈린과 김일성에 의해 철저히 기획된 명백한 남침 전쟁임을 알 수 있다.

북한과 소련, 중공의 의도를 꿰뚫고 있던 이승만 대통령은 1950년 7월 19일 트루먼 미국 대통령에게 이렇게 편지를 보냈다. “이 전쟁은 남과 북의 대결이 아닙니다. 이 전쟁은 우리나라의 반을 어쩌다 점거하게 된 소수의 공산주의자와 압도적 다수의 한국 시민들 사이의 대결입니다.”

김재동 목사

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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