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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외국 친구, 20년 만에 찾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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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위미현 작성일20-07-22 12:30 조회20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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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초의 잡설 2.0]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에서 사람을 찾아주는 비영리 공개 온라인 사이트

[오마이뉴스 조마초 기자]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Reconnect. FREE. 사이트 대문 캡처
ⓒ 조마초

 
나는 전에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십여 년간 살았다. 한국으로 온 후에도 그때 친했던 이들과는 종종 만났고 소식을 주고받았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전화번호, 주소 등 기본 연결고리가 바뀐 그들을 찾을 방법은 요원했다.

오스트레일리아는 범죄인이 아니면 거주지를 정부에 신고할 필요가 없고, 여성은 결혼하면 남자 성(姓)을 따른다. 개명도 쉽고, 연락처도 비공개로 하면 찾을 수 없다. 그래서, 연락할 방법을 고민하다 무작정 오스트레일리아 관련 SNS 등에 지인들 이름과 사연 등을 올렸더니 누군가 한 사이트를 알려주었다.

"Reconnect. FREE."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에서 헤어진 가족, 지인 등을 찾아주는 비영리 공개 온라인 사이트다. 이 사이트 운영자 버즈(Vig)는 어릴 적 부모의 이혼으로 형제 자매가 뿔뿔이 흩어졌다. 그 후부터 그녀는 혼자 생각하고, 혼자 결정하고, 마음의 상처마저 혼자서 아물게 해야 했다. 그래서, 헤어진 사람들이 다시 만날 수 있게 해보자 고민했다. 그녀 자신은 아직도 친형제 자매를 못 만났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재회할 기쁨을 느끼게 해 주고 싶었다.

그렇게 6년 전, Reconnect. FREE의 첫 삽을 떴다. 그동안 5만3천여 명으로 늘어난 잃어버린 퍼즐을 찾는 회원들이 서로 품앗이해 이제껏 5300여 만남을 이뤄냈다. 약 10%의 성공률이다. 회원들은 길게는 수 십 년간 다양한 방법으로 찾았지만, 공백으로 남아있던 퍼즐 빈칸에 딱 들어맞는 조각을 서로에게 정확히 끼워 주었다.

퍼즐 빈칸은 이혼, 별거, 졸업, 이사, 입양, 미아 등으로 갈라져 오랫동안 그리워했던 이들이었다. 한편으론, 선뜻 재회를 원치 않은 일부의 응어리도 이해할 수 있다. 

가입엔 세 가지 조건이 있다. 모임의 규칙과 규정을 존중하고 따른다. 개인관계 외 뒷조사는 안 한다. 합법적인 방법으로만 사람을 찾는다. 또, 회원이 되면 지켜야 할 것들이 있다. 스토킹을 배제하고, 지인, 가족의 새 가족, 사생활, 미성년자 등의 예민한 정보 노출은 안 된다. 자신을 노출하고 싶지 않으면 운영자를 통해서 실명 노출 없이 사연을 게시할 수 있다. 개인정보보호법을 지키며 규정에 따른다.

운영진은 규정에 어긋난 게시물 등을 제한해 건전한 환경을 유지하고, 재회한 회원은 게시글을 내린다. 회원들끼리 합법적인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블로그 및 선거인 명부(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의무투표제라 투표 안 하면 과태료가 있어 누락이 거의 없다) 등에서 성(姓)과 이름 등으로 찾는다. 

버즈를 포함, 여섯 명의 자원봉사 운영진이 견인차 구실을 하며, 지난 수년간 성공적으로 운영해 유일한 비영리 공개 온라인 사람 찾기 사이트로 이끌었다. 그리운 이들의 실마리라도 잡기 위해 알음알음 가입한 회원들은 비록 서로를 직접 알진 못했지만 서로의 상처를 치유하며 가족같이 끈끈해졌다.

우리처럼 전쟁을 겪지 않은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에 무슨 이산가족이 있을까 하는, 내 추측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핑계 없는 무덤 없고, 사연 없는 눈물 없다.' 라고, 우리보다 개방적인(?) 사회분위기 때문인지 많은 (생물학적) 친모와 친부, 친형제 자매, 이복형제 자매, 친인척과 친구를 찾는 사연들이 이어진다.  

친모나 친부에 대한 정보도 (정확치 않은) 성과 이름, 고향, 국적, 생년 정도다. 친형제 자매도 너무 어려 헤어졌기에 기본 정보조차 부족하다. 출산 후 입양된 경우는 더하다. 친부가 자식의 존재를 전혀 모르고 있던 경우도 꽤 된다. DNA 테스트 결과 생각지도 않은 이복형제 자매까지 생긴다.

재회한 사연도 속속 올라온다. 30년 만에 친부 소식을 들었으나 안타깝게 몇 년 전 사망해, 이복동생들과 처음 만났다. 입양된 딸을 40년 만에 찾은 사연도 있다. 30년 만에 고교동창과 재회했다. 재회한 가족, 지인과 함께 성탄절을 보내거나, 여행 갈 계획이다 등등.  

수십 년 만에 만났어도 서로를 금방 알아보는 것을 보면 피는 통하나 보다. 긴가민가할 때는 DNA 테스트로 확인한다. 헤어졌던 친부나 친모 덕에 이복형제자매란 선물이 생겼다며 같이 웃는 사진도 올라왔다. 최근엔, 수십 년 만에 타 주(州)에 사는 친부, 친구 등과 연락됐으나 팬데믹 사태에 화상통화로 만족했다는 사연이다.

나도 혹시나 이름과 사진 등 지인을 찾는 게시글을 올렸더니 며칠 만에 댓글이 달렸다. 마틴을 찾는 게시글엔 뉴질랜드 본가 주소와 전화번호가 있는 선거인명부 캡처 댓글이 달렸다. 20년 전 카지노 딜러였던 제이슨은 지금 타 주 고교에서 철학을 가르친다. 아쉽게도 또 다른 두 친구에 관한 댓글은 아직까지도 없다.

제일 궁금했던 페뜨로를 찾는 게시글에도 댓글이 달렸다. "이름과 가족 관계를 보니 당신이 찾는 사람이 맞다면 안타깝지만 우선 진심으로 고인의 명복을 빈다"며, 7년 전 일간지 부고란을 캡처해 올렸다. 페뜨로는 약 7년 전 건강이 안 좋아 요양한 후 연락하겠다는 이멜을 내게 보냈었고, 그후 내 이메일과 전화에 답이 없었다.

원래 농담을 잘했고, 나에게 항상 술·담배를 끊으라는 잔소리를 해대서 굳이 연락을 안 했다. 전부터 종종 말했듯이 부모 고향인 그리스의 한 섬으로 요양을 떠났나 싶었는데… 며칠 간 그를 되새기자 슬펐고 쓸쓸한 미소도 흘렀다.

자녀를 찾는 건 내 몫이었다. 페뜨로의 자녀들은 그가 내 이야기를 자주 해서인지 다행히 날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모두 건강한 사회 구성원으로 성장해 행복한 가정까지 꾸려 그가 하늘에서도 분명히 자랑스러워할 것 같았다. 항공 길이 다시 열리면, 오스트레일리아로 가 그의 자녀들과 함께 그의 묘를 꼭 찾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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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5일 10시 경암교육문화재단 경암홀 영결식 후 경남 양산에 안장

평생에 걸쳐 사업운영과 근검절약으로 모은 재산을 사회에 환원해 온 향토사업가 耕岩 송금조(1923~2020) 경암교육문화재단 이사장이 7월 21일 오후 6시 14분께 별세했다. 향년 98세.

부산대학교(총장 차정인)는 2003년 부산대에 305억 원을 기부약정하고 지역발전과 교육문화 증진을 위해 헌신한 故 송금조 이사장의 숭고한 뜻을 기리고자 고인의 장례를 부산대학교·경암교육문화재단장(葬)으로 치르기로 했다고 22일 밝혔다.

故 송금조 이사장은 일제강점기와 6·25전쟁 등 역사의 격동기를 겪은 신산한 삶 속에서도 여러 사업을 통해 어렵게 모은 재산을 지역 발전과 교육 진흥에 대한 일념으로 나누고 베풀어 왔다. 최근 건강이 악화돼 부산 아미동 부산대학교병원에 입원 치료 중 7월 21일 오후 6시 14분 영면에 들었다. 유족으로는 부인 진애언 경암교육문화재단 이사장이 있다.

부산대는 유족과의 협의를 통해 차정인 부산대학교 총장과 이장무 경암교육문화재단 위원장(前 서울대 총장)을 공동 장례위원장으로 하는 장례위원회를 구성해 고인의 장례를 ‘부산대학교·경암교육문화재단장(葬)’으로 거행한다. 김기섭·전호환 前 부산대 총장과 경암교육문화재단 측 윤덕용 前 KAIST 총장이 고문을 맡았다.

장례부위원장은 부산대 교육부총장, 의무부총장, 부산대병원장, 양산부산대병원장과 경암교육문화재단 경암상위원회 김일순·김인준·임지순‧김동호 위원 등 8인으로 구성했다. 장례위원은 부산대 본부 주요 보직자 및 단과대학장, 전문대학원장, 직원협의회장, 총학생회장과 경암교육문화재단 도종이·최경보·이건우·정인곤·정영인·우신구 이사가 포함됐다.

장례위원회는 장례를 5일장으로 진행하기로 하고, 부산시 부산진구 부전동에 위치한 경암교육문화재단 2층 경암홀에 빈소를 마련한다. 영결식은 같은 곳에서 25일 오전 10시 거행할 예정이다. 코로나19 상황을 감안해 장례는 방역지침을 철저히 준수하여 엄숙하고 안전하게 치를 예정이다.

부산대는 이와 별도로 교내 대학본부 앞에 분향소를 설치해 경암 송금조 회장을 추모하기로 했다.

故 경암 송금조 회장은 1923년 경남 동래군 철마면 송정리에서 태어났다. 열일곱에 첫 직장인 약품 회사에 취직했고, 해방 직후 1947년 이십대 초반의 나이에 ‘태양약품’을 설립해 약품도매상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1974년 금형사출공장인 ‘태양사’ 설립은 획기적이었다. 태양사의 식기세트는 품질을 인정받아 유럽전역과 미국에 수출됐다. 뒤이어 봉제공장 ‘태양산업’, 플라스틱사출공장 ‘태양화성’ 등을 성공시키며 1987년 ‘1,000만 달러 수출탑’을 수상했다. 수출실적은 3,000만 달러까지 올라갔다. 1986년 산업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대통령 산업훈장 등을 여러 차례 받기도 했다.

부산지역에서 개인 소득세 1위 자리를 지켰던 것도 10년 가까이에 이른다. 그 가운데서도 종합토지세는 1992년 과세표준액 기준 2위를 하는 등 1990년대 중반까지 전국 최상위에 꼽히곤 했다.

자서전을 통해 “일생을 여러 사업에 매달려 오면서 돌멩이를 걷어내며 자갈밭을 갈 듯이 살아왔다”고 밝힌 故 송금조 이사장. 그의 삶은 요산 김정한 선생이 지어준 ‘경암(耕岩, 돌과 자갈밭을 갈아 옥토를 일구듯 열심히 살라)’이라는 호의 의미 그대로였다. 경암 선생은 부와 명예를 좇거나 허영과 과시로 가득 찬 인생을 멀리하고, 땀과 헌신으로 세운 일생과 정직하게 열심히 살았다는 자체만으로도 큰 보람으로 삼았다.

故 송금조 회장은 사업을 키우고 돈을 버는 일도 중요했지만 학문과 교육, 문화의 뒷받침 없이는 어느 국가나 사회도 발전을 기약하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그는 사회 환원에 대한 평생의 지론을 실천하기 위해 이미 양조장과 정미업으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둔 30대 후반에 들어 본격적으로 육영사업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배움에 목말랐던 청년시절의 열망을 고스란히 가슴에 품고 있었던 故 송 이사장은 자신의 재산을 후세 교육을 위해 쾌척하기로 했다. 1985년 학교법인 태양학원을 설립하고 이듬해 경혜여고를 설립해 중등교육 육성에 매진했다. 그는 2000년 사학을 육성한 공로로 봉황장을, 2002년 국민교육유공자로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2003년 한국 개인 기부금 사상 최고액인 305억 원을 부산대에 기부약정했다. 2004년 2월에는 사재 1,000억 원을 출연해 경암교육문화재단을 출범시켰다. 향토사업가 경암이 대부분의 사업을 정리하고 만년에 힘을 쏟은 것은 지역발전과 교육문화 진흥의 일념이었다. 본인의 전 재산은 모두 재단에 기부한다는 소신을 밝혔다.

차정인 부산대 총장은 “탁월한 기업경영 능력으로 평생을 소중하게 모은 재산을 후세교육과 우리 사회 문화 발전에 아낌없이 베풀어주신 송금조 이사장님은 정직하고 존경받는 사업가를 넘어 따뜻한 교육자”라며 “평소 보여주신 교육에 대한 깊은 관심과 남다른 열정, 그 숭고한 뜻에 경의를 표하며, 송금조 회장님의 삶과 정신은 우리 후세들에게 끊임없는 울림을 전해줄 것”이라고 추모했다.

정순형 선임기자 junsh@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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